1657(메이레키 3)년에 에도성 천수각과 다케바시 일대 무가 저택 등 에도 거리를 태운 「메이레키 대화재」(음력 1월 18~20일=지금의 3월 2~4일)가 원인을 둘러싸고 「후리소데 화재」로 불린다는 것을 아시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발화원으로 여겨지는 혼묘지(분쿄구 니시카타 2초메, 1910년에 도시마구 스가모로 이전)의 공양탑에도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위 사진).

이 블로그에도 여러 번 나온 정부 중앙방재회의 「재해 교훈의 상속에 관한 전문조사회」 보고서 「1657 메이레키 에도 대화재」(헤세이 16년 3월)도 「후리소데 전설」 칼럼(여담)을 실어, 야다 소운 『에도에서 도쿄로』(1920년 간)에 소개된 일화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개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자부의 전당포 엔슈가의 외동딸이 혼묘지에 참배했을 때 스쳐 간 고쇼(절에서 주지에게 시중드는 소년)에게 첫눈에 반해, 위로삼아 고쇼와 같은 무늬의 후리소데를 만들었으나, 메이레키 원년 정월 16일(음력 1655) 17세로 상사병에 걸려 죽고, 엔슈야는 딸의 관에 후리소데를 덮어 장지를 보낸 뒤 후리소데를 혼묘지에 납입했습니다. 후리소데는 들어온 절의 유관장(시신 세척장) 사람들의 술값이 된다는 당시 관례에 따라 헌옷집에 팔렸으나, 1년 후 딸의 기일에 이번에는 우에노 지물상 다이마쓰야의 딸(17세) 장례에서 다시 이 후리소데가 혼묘지에 납입되고, 또 팔자 이듬해 같은 날 혼고의 누룩집 딸(17세) 장례에서 세 번째로 같은 후리소데가 혼묘지에 납입되자, 이쯤 되니 주지도 두려워져 세 유족과 상의해 후리소데를 공양하기로 하고, 메이레키 3년 정월 18일 들불에 던졌더니 한 줄기 회오리가 북쪽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 80척의 본당 바로 위로 불어 올려 타오르게 하여 대화재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진짜 이야기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지만, 왜 그런 이야기가 퍼졌을까. 보고서는 「대화재 전에 유행한 『시바가키부시』(에도 초기 속요) 원곡에 후리소데와 얽힌 가사가 보이고, 후리소데는 당시 고쇼의 옷이었다. 이로부터 에도 사람들은 『시바가키부시』를 메이레키 대화재의 불길한 전조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후리소데 전설』이 태어날 바탕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추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