팰리스사이드 빌딩에서 하쿠산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 진보초로. 교차로를 건너 오른쪽 앞으로 들어가면 치요다구립 오차노미즈 초등·유치원이 있습니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동서 약 200미터, 남북 약 600미터의 길쭉한 지역이 「사루가쿠초」입니다. 오차노미즈 초등 철망에는 「사루가쿠초 1정목 1」 주소 표시가 걸려 있습니다. 사루가쿠초 중심을 등뼈처럼 사루가쿠 거리=사진 오른쪽 아래=가 달립니다.

 사루가쿠초 북서쪽 이웃, JR 스이도바시역 남쪽 바로 앞의 남북·동서 각 약 500미터 사다리꼴 지역이 「미사키초」입니다.

 이 두 정에서 정명을 둘러 「칸다」를 붙일지 말지의 「관」 논쟁이 뜨겁다고 합니다.

 발단은 2004년, 두 정의 「칸다」 부활 요망서가 서명 약 1100명분과 함께 구에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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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약 1500명분의 반대 서명이 나와 찬반이 반으로 갈렸습니다. 2012년 구가 실시한 설문에서는 찬성·어느 쪽인가 하면 찬성이 57%, 반대·어느 쪽인가 하면 반대가 42%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메이지 초기에는 「미사키초」「사루가쿠초」라는 정명이었다가, 제2차 대전 후 1947(쇼와 22)년에 칸다구와 고지마치구가 합병해 치요다구가 되면서 옛 칸다구의 정이 일제히 칸다를 관으로 달게 되어, 각각 「칸다미사키초」「칸다사루가쿠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962년, 우편 배달 등의 효율화를 노린 주소 표시법 시행에 따라 구는 「칸다 관칭 불채택」을 결정하고, 각각 1967년에 미사키초, 1969년에 사루가쿠초가 되어 지금에 이릅니다.

 치요다구는 정명을 문화로 소중히 여기는 듯, 홈페이지에 일부러 「정명 유래판」이라는 페이지를 두고 110개 정명 설명을 게재(http://www.city.chiyoda.lg.jp/koho/bunka/bunka/chome/yurai/index.html)하고 있습니다. 관 부활이 구의 속마음일지도 모릅니다.

 그 정명 유래에 따르면, 미사키초는 에도 막부가 열릴 무렵까지 미사키촌이라 불렸고, 히비야이리에라는 얕은 바다에 튀어나온 땅의 끝에 있어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윽고 만과 습지는 매립되고,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무가 저택이 늘어선 정으로 바뀌어, 1872(메이지 5)년 도쿄의 많은 정이 새 정명으로 바뀌었을 때 이 일대는 미사키초로 개칭되었습니다. 「칸다미사키초」였던 것은 제2차 대전 후 1947~67년의 20년쯤뿐입니다.

 사루가쿠초도 에도 시대에는 일대가 무가 저택으로, 지금의 긴카 거리가 오모테사루가쿠초, 사루가쿠 거리가 우라사루가쿠초라 불렸습니다. 게이초 연간 무렵, 지금의 칸다 진보초에서 니시칸다에 걸쳐 사루가쿠사·간제다유의 일좌 저택이 있었던 것이 이름의 유래입니다. 전후 칸다의 관이 붙어 있던 것은 22년쯤입니다.

 실은 1960년대에 칸다 관 폐지가 결정되어도, 「칸다 진보초」나 「칸다 오가와마치」 등 칸다를 떼지 않은 정이 지금도 26개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는 「가지초」처럼 1·2정목은 「가지초」가 되었는데 3정목만 「칸다가지초」로 남은 곳도 있습니다. 그런 일도 있어 관 부활파는 「칸다는 가치 있는 브랜드명. 역사 있는 명칭을 되살려 지역을 활성화하고 싶다」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반대파는 사루가쿠초 등이 원래 무가 저택이라 「『칸다』의 뜻은 신사에 바치는 공물을 만드는 논밭인데, 왜 뜻이 다른 이름을 위에 붙이나」고 말합니다. 또한 사루가쿠초의 경우 시부야구의 사루가쿠초, 미사키초도 가나가와현의 옛 미사키초(현 요코스카시) 등 헷갈리는 다른 지명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도 칸다를 관으로 달아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사업자로부터는 「주소 표시가 바뀌면 인쇄물 교체 등으로 지출이 는다」는 절실한 목소리도 들린다고 합니다.

 아무튼 에도 시대부터 일본의 중심·도쿄의, 그 한가운데에 자리한 치요다구입니다. 교토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수많은 정명 하나하나가 「에도 개부 이래 면면히 이어져 온 역사가 키운 전통과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구 홈페이지). 그곳에 몇 대, 몇십 대에 걸쳐 살아온 사람부터 새 주민까지 다양한 사람이 살고 일하니, 의견이 갈리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11월에 구의 「주거 표시 심의회」라는 공식 기관이 34년 만에 열려, 관 부활에 찬성·반대 양쪽 주장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게 된 듯합니다. 특정비밀보호법처럼 「강행 채결」할 수는 없을 것이고, 논의가 수렴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