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쇼와 11년), 2·26 사건도 다케바시 앞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했습니다. 당시 도쿄 니치니치 신문(마이니치신문의 전신)을 조금 더 넘겨 봅시다.
2·26 사건을 계기로 군국주의가 가속되고, 이듬해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에 돌입…… 파국을 향해 돌진하지만, 그런 시대였음을 확인시키는 기사가 2·26 사건 당시에도 지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2월 29일 조간은 「대부대의 공산군 山西를 휩쓸 형세」 제목으로 「공비(공산당군)의 주력이山西에 집중되면山西군만으로는 저지하기 어렵다」고 보도합니다. 소련과의 관계도 「만로분쟁 사건 실로 270건 성의 없는 러시아의 태도」(29일 석간)로 긴장 고조를 전합니다. 참고로 만몽 국경에서 일소 양군이 충돌한 노몬한 사건은 3년 뒤입니다.
세계대전으로의 발소리도 확실히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2월 29일 조간은 런던 군축 회의에서의 각국 대립을 보도합니다. 1930년에 일미영이 해군력 감축에 합의한 군축 회의에 이어 「제2차 런던 군축 회의」이지만, 일본은 그해 1월에 탈퇴했고, 기사도 「일본 탈퇴 후 군축 회의 미와 불·이 대립 중재자 영국의 고민 축이 꺾인 수레의 걸음」이라는 냉담한 보도입니다. 이후 이탈리아도 탈퇴하고, 3월 하순 미·영·불만의 합의는 이루어졌으나 세계대전을 막을 힘은 되지 못했습니다.
또 3월 8일 조간은 「유럽 정국에 또 폭탄」이라는 볼록판 흰 글씨 제목으로 「로카르노 조약 파기 과연·독일 정부 통고」를 보도합니다=사진 ㊤. 비무장 지대로의 독일군 진주를 전한 것으로, 당일 호외로 「전운 부르는 라인 강변 프랑스 정부 긴급 대책 회의」 후속 보도가 이어집니다. 수험 공부와 세계사 수업이 떠오릅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평화를 담보한 베르사유 조약 체제의 종언입니다. 전년 일독 방공 협정을 맺었으므로 일본은 독일 지지 논조였습니다.
국내에도 주목할 기사가 있었습니다. 3월 10일 조간 사회면에 「오모토교 총무 쿠리하라 하쿠레이 유치장에서 자살」이 크게 실렸습니다=사진 ㊦. 공산주의 운동 단속을 주안으로 한 치안유지법이 종교에 적용된 최초의 사건이며, 다카하시 카즈미의 「사교문」 소재는 이 사건과 연관된다고 합니다. 오모토교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이지만, 어쨌든 전시체제로 향하는 큰 흐름의 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