팰리스사이드 빌딩을 나와 에도성(고쿄) 다야스문 일대를 조금 더 산책합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이야기를 썼지만, 다야스가라면 한 사람 더, 막말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즉 슌가쿠=위 사진, 후쿠이시립 향토역사박물관 소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히토쓰바시가 출신 다야스가 3대 당주 나리마사의 팔남으로 1828년 태어나 아명은 긴노조. 이요 마쓰야마번주 마쓰다이라 가쓰요시의 양자가 되기로 결정되어 있었지만, 1838(덴포 9)년 7월 에치젠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나리사와가 19세로 급사. 후계가 없어 급히 긴노조가 양자로 되어 10월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가독을 겨우 11세로 이었습니다. 후에 슌가쿠는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함께 대로 이이 나오스케와 대립. 이이 실각 후 1862(분큐 2)년 신설 정사총재직에 올라, 후의 15대 쇼군 히토쓰바시 요시노부와 함께 교토 수호직을 설치해 아이즈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수호직에 앉히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상락 등 ‘공무합체’를 추진. 그 후 에치젠을 버리고 전군으로 교토를 제압해 조정·막부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정국 내 과잉 대립을 무력으로 억누르며 널리 인재를 등용해 완만한 개혁을 밀고 가려 생각하고, 사쓰마번과 연계하며 구마모토번이나 가가번 등에도 가세를 청했으나 결국 단념……이라는 눈 깜짝할 인생을 보냈습니다.

번정 개혁에 힘쓰고 막말 사현후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 것도 또 하나의 측면(다른 3인은 도사번 15대 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요도, 사쓰마번 11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우와지마번 8대 번주 다테 무네나리). 그러나 막말 동란에서는 여러모로 획책했다기보다 여러 세력 사이에서 조정에 움직이고 또 농락당하는 등 파란의 전개 끝에 성과는 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정봉환 때에는 요시노부의 상담에도 응했다고 하지만, 신정부에서는 단기간 내국사무총독, 민부관 지사, 민부경, 대장경 등을 역임했으나 일찍(1870=메이지 3년) 정계를 떠나 1890(메이지 23)년 61세로 사망했습니다.

이 밖에 다야스가라면, 요시노부 근신 후 1868(메이지 원)년에 다야스가 7대 당주 가메노스케가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해 16대 이에사토=아래 왼쪽 사진, 개인 소장·위키피디아=가 되고, 대신 아버지로 다야스가 5대 당주였던 요시요리=아래 오른쪽 사진, 후쿠이시립 향토역사박물관 소장=가 다야스가 8대 당주로 재등장. 이에사토는 ‘16대님’으로서 화족에 열해 공작을 받고 귀족원 의장 등을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