팰리스사이드 빌딩을 나와 에도성(고쿄) 다야스문을 찾는 산책의 이어짐입니다.

다야스가 초대 당주 무네타케와 9대 쇼군인 형 이에시게의 알력의 심함을 썼지만, 그 후 다야스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먼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네타케의 아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1759~1829년)=위 그림, 진코쿠슈코쿠신사 소장=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다노부는 일찍 시라카와번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로의 양자행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무네타케의 적자 하루사토가 요절해도 다야스가를 이을 허가가 나오지 않아 다야스가는 한동안 아케야시키가 되고, 후에 히토쓰바시가 출신 나리마사가 이었습니다. (고산쿄는 당주가 죽고 후계가 없어도 보통 다이묘처럼 오이에 몰수가 되지 않고, 당주 공석으로 가문만 이어지는 ‘아케야시키’가 허용되어, 실제로 그런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2015년 11월 24일 이 블로그 「시미즈문⑥」 참조)

그래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입니다. 무네타케의 칠남이지만 어릴 때부터 총명하다는 평이 높아, 한때 병약한 하루사토를 대신하는 다야스가 후계자, 그리고 장차 10대 쇼군 이에하루의 후계로도 점쳐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시무네의 측근으로 요시무네부터 3대 쇼군을 섬기며 권세를 부린 다누마 오키쓰구를 ‘뇌물 정치’라고 비판한 탓에 소원히 여겨져 도호쿠로 ‘날려진’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다노부는 오키쓰구를 격렬히 미워했다고 하는 한편, 중앙 정치에서 지위를 얻기 위해 이번에는 자신이 오키쓰구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다노부라면 역사 수업에서 배운 ‘간세이 개혁’이지요. 사다노부가 로주 재임 중 1787~1793년에 이뤄진 막정 개혁으로, ‘교호 개혁’ ‘덴포 개혁’과 함께 에도시대 3대 개혁이라 불립니다. 아사마산 분화, 도호쿠를 중심으로 한 덴메이 대기근 등을 받아 잇기와 우치코와시가 잇따르는 가운데, 파탄난 재정 재건과 실추한 막부 권위 회복을 꾀한 것으로, 긴축 재정이 최대 특징이었습니다. 아니, 3대 개혁은 모두 ‘질소 검약을 중히 여긴다’는 긴축이 공통항으로, 사람들에게 참음을 강요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디플레 정책이므로, 케인스를 아는 현대인 눈에는 재주가 없다고 하면 그런 것이 됩니다. 조부 요시무네의 교호 개혁을 본보기로 했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검약을 강요한 데 더해 극단적 사상 통제로 이 시대 경제·문화는 정체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이 사다노부는 신경질적이고 의심 많은 성격이었기에 미움받았을지도. 결국 서민 반발이 높아지는 가운데 권력 투쟁에 패해 로주 재임 6년 만에 실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