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팰리스사이드 빌딩을 나와 에도성(고쿄) 석축 구경입니다. 라고 해도 오히려 ‘문’ 구경이 되고 있지만…… 다야스문의 이어짐입니다.
위 사진은 메이지 유신 무렵 문의 모습. 『구 에도성 사진첩』의 한 장입니다(국립문화재기구 ‘e국보’).

1730(교호 15)년 8대 쇼군 요시무네의 차남 무네타케=(오른쪽 그림)=가 여기에 저택을 받아 다야스가를 일으킨 것은 2015년 8월 11일 이 블로그 시미즈문 이야기에서 썼습니다. 확인해 두면, 무네타케가 다야스문에서 들어간 서쪽에 저택을 받은 지 27년 후, 동쪽에서 시미즈문에 이르는 곳에 시미즈가 저택이 생겼습니다.
무네타케는 처음 쌀 3만 효를 받았다가 1746(엔쿄 3)년에 영지로 바뀌어 10만 석분의 영지를 받았지만, 무사시, 고즈케, 가이, 이즈미, 셋쓰, 하리마 6개국에 분산되어 영지에 사는 일은 없고, 쇼군 가까이 늘 있다는 고산쿄로서의 임무를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다야스가는 시미즈가와 마찬가지로 쇼군을 배출하지는 못했습니다.
초대 무네타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몸이 약했던 형 이에시게=(왼쪽 아래 그림), 도쿠가와 기념재단 소장=를 대신해 쇼군 후계자로 미는 이도 있었고, 요시무네도 한때 무네타케 후계를 생각했으나 3대 쇼군 이에미쓰와 동생 다다나가의 고사를 따라 장유의 서를 중시해 이에시게에게 잇게 했다고 합니다(이에시게의 적남 이에하루가 총명했으므로 거기

에 기대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쇼군 후계 문제는 꼬리를 끌어 무네타케가 등성 정지되거나, 무네타케를 민 로주 마쓰다이라 노리사토가 파면되는 등 여러 일이 있었고, ‘화해’한 뒤에도 무네타케는 평생 이에시게와 대면하지 않았다고 하니 상당히 응어리가 있었겠지요.
앞서 시미즈가를 쓸 때, 고산쿄가 탄생한 것은 도쿠가와 종가와 고산케의 혈연이 점차 소원해진 데서 다른 친족을 쇼군가 가까이에 두고 후계 공급원으로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권모술수가 소용돌이치는 에도성 안에 신흥 세력이 진입한 형태로 오히려 정쟁을 격화시켰다는 견해도 소개했습니다. 요시무네는 일반적으로 ‘교호 개혁’ 등으로 명쇼군이라 불리며 ‘난폭한 쇼군’ 드라마도 있어 인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에도성 안에 다툼의 씨를 뿌린 일면도 있다는 것이겠지요.
